ㆍ"나무 만지는 작업이 연기와 달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비슷해요.
ㆍ하나의 작품이 나오기 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3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아온 천호진이 목수가 돼 책을 냈다는 소식에 여기저기에서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 "배우가 책 낸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볼멘소리를 하는 그에게서 물씬 사람 냄새가 난다. 나무 냄새 같기도 하다.
촉촉이 겨울비가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서울에서 꽤 먼 길을 달려 경기도 김포에 있는 그의 작업장을 찾았다. 도로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만들고'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보인다. 지난 9월, 인터넷 생활목공예 가구회사 '만들고'를 오픈한 천호진의 또 다른 일터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거의 매일 나와 작업을 해요. 출퇴근도 직원들과 같이하고요."
그가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오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가구 만들기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이왕 시작한 사업이니 장사가 잘되면 좋겠지만 단순한 목적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연예인처럼 선택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취미가 중요해요. 일이 몰릴 때는 정신없다가도 금세 허무해질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저에게는 그게 나무였어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프라모델이나 RC비행기 등 뭐든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윈도우도 모뎀 시절부터 사용했고 그때 처음 접한 인터넷을 통해 목공도 알게 됐다. 그때가 1990년대 중반이었다. 뭐든 한 가지에 빠지면 무섭게 집중하는 성격이다. 외국 목공 관련 서적을 100권 넘게 주문해 아파트 베란다에 영어사전과 함께 펼쳐놓고 책에 적힌 대로 톱질, 망치질을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독학으로 배운 목공이 이제 제2의 인생이 됐다.
"생활목공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고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뿌리박고 서 있는 나무를 베면서부터 시작돼 작품이 나오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요. 기다림 없이는 누구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형태의 작품을 만들지 못하거든요. 나무 만지는 작업과 연기가 달라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비슷해요."
그냥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뚝딱거리며 나만의 가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생활목공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같은 재료로, 같은 설계도를 보고 만들어도 단 한 가지도 똑같은 작품이 없다.
DIY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DIY=싸다'는 생각이다. 그는 목공 DIY가 '절대 싼 취미'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이 나무인데 거의 100% 수입한다. 공구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먹고살기 힘든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공구 역시 대부분 수입품이다. DIY는 싸서 좋은 게 아니라 나만의 디자인으로 만드는 '핸드메이드' 작품이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직접 손으로 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난 10년 동안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배우들도 경력 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개런티를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DIY도 마찬가지예요. 직접 내 손으로 만들어보면 그 기술의 가격과 가치를 안정할 수 있을 거예요."
연기도 목공도 사람이 중심
인터뷰를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옆에서 작업 중이던 크리스마스트리가 어느새 완성돼 반짝 하며 불이 켜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탄생한 이 작품은 어느 주부의 아이디어로 만들게 된 것. '만들고' 홈페이지에 올려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홈페이지 동영상 목공 강좌와 작업장 오픈 강좌를 통해 여러 DIY 초보자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초보자들을 위한 DIY 실용서 「천호진의 목공 DIY」를 펴냈다.
"DIY 초보자들의 실수를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제가 교재도 없이 목공예를 독학하며 겪었던 어려움들을 생각하며 쓴 책이에요. DIY에 대해 이 정도 개념을 알고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싶어 기본에 충실하게 썼어요. 목공 DIY에 관한 기본 가이드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얼굴 팔린 놈이 책 내서 시장이 좀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게 최종 바람이다. 사용자들이 개념을 제대로 알아야 그 가치를 인정하고 판매자도 책임감을 갖게 돼 건강한 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10원을 벌더라도 제대로 벌어야 해요. 양심상 자신의 분야에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야죠. 그게 그걸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도리예요."
시간이 갈수록 책임감이 커지는 건 배우로서도 마찬가지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한 그에게 '책임감 없는 드라마'는 결코 긍정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시청률에 매달려 자극적인 스토리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막장 드라마는 딱 질색이라고. 한동안 TV 출연이 뜸했던 것 역시 27년 차 배우로서 생각하는 제대로 된 드라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요즘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그대 웃어요'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도 그러한 기준에 따라 선택한 작품이다. 영화건 드라마건 언제나 분명한 자기 원칙에 따라 선택해왔다. 목수가 좋은 나무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하듯 배우는 좋은 작품을 선택할 줄 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배우가 작품 하나도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지 못한다면 마네킹과 뭐가 다르겠어요. 그 배우가 나오는 작품이라면 믿음이 가게끔 하는 게 자기관리예요. 관객들이 제작사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진 않잖아요."
그가 소속사와 매니저 없이 활동하는 건 "배우로서의 고집을 포기하기 싫다"는 말로 설명이 될 것이다. 요즘 무엇이든 사람 중심이 아니라 물질 중심이 되어가는 게 싫다.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됐어요. 30년 가까이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을 연기하며 사람 공부 한 셈이죠. 나무를 만지는 일도 결국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거든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사람이 상품이 돼 딸려가요."
원칙을 중시하고 고집을 부리는 게 요즘 같은 세상에 고루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잔소리꾼이 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있어야 지금 사회가 그나마 바로 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나무로 치유받다
인터뷰 중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반 아직 안 무너졌냐"며 묻는 걸 보니 그가 가구를 선물한 친구인가 보다. 굳은 표정으로 '책임론'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얼굴에 금세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진다.
"친구들한테도 몇 개 만들어줘요. 선배나 후배들한테도 만들어주고. 아직 A/S 요청은 없어요(웃음)."
"나무가, 자연이라는 게 인간이 가진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10년 동안 나무를 만지며 터득한 가장 큰 소득이죠. 제가 무지하게 급한 성격인데 나무를 만질 때는 여유가 생겨요."
디자인부터 재단, 조립과 칠 등의 단계를 거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시나리오를 받고 배역을 연구하고 연습과 촬영을 하는 배우 생활과도 꼭 닮았다. 어찌 보면 인생의 여정과도 같다.
"목공일은 등산과 같아요. 한동안 제가 산에 미쳐서 2, 3년 동안 산을 탄 적이 있거든요. 차근차근 단계를 거치는 과정이나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의 가구를 완성했을 때의 기분이 산 정상에 오른 기분과 같더라고요."
다치기도 부지기수다. 가구 만들기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상해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목공을 로망과 판타지만 가지고 접근했다가는 고생하기 십상이다.
"막연하게 '은퇴하고 목공일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 막연한 거에서 가치와 개념을 알고, 좋은 습관을 들여서 첫발을 내딛을 때 현실이 될 수 있어요. 분명한 건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목공은 결과가 있어야 해요. 책만 보고 '이렇게 하는구나, 저렇게 하는구나' 하는 건 소용없어요. 개념을 먼저 이해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목수와 나무는 궁합이 있다. 수천 가지 원목 중 그가 맨 처음 만난 나무가 오크, 참나무였다. 그래서 그런지 참나무 원목으로 작업을 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반면 물푸레나무는 잘 맞지 않아 작업할 때 힘이 든다. 둘 다 단단한 나무지만 그렇게 호불호가 갈린다. 알 듯 말 듯, 나무도 사람만큼 참 오묘한 존재다. 불혹에 만난 나무를 지천명에 알았다. 연기도 나무도 평생 함께할 친구이기에 그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 출처 : 경향닷컴(khan.co.kr) 글 노정연 기자, 사진 제공 오픈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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